[책 갈무리] 공부 공부

2018. 12. 24. 18:01

공부 공부 : 자기를 돌보는 방법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 엄기호 / 따비 / 2017.07.13


[마음에 드는 글귀]


들어가며 : 설령 천하를 얻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늙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리고 나서 살펴본 한국 사회에서의 삶은 이처럼 끔찍했다. 이 질문으로 우려하는 상황이 대다수의 사람이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기 떄문이다. 제대로 늙는 게 아니라 제대로 사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다들 감당하지 못할 상처를 부여잡고 우울해하거나 화가 나 있다. 그런 상황을 바꾸지도 못하고, 그 상황에 처해 있는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도 못한다. 그러니 그저 자신을 괴롭히며 살고 있다. - 12쪽


자기 자신과 화해하려면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누군지 모르는데 화해할 수는 없다. 또한, 화해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어디에서 자신과 분열되어 있는지 봐야 한다. 어디서 만나야 할지 모르는데 화해할 수는 없다. 자기와 화해하려면, 자기가 누구인지 알려면, 자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에 집중하는 것이 지금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 세상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내 거기에 맞춰도 겨우 살아남을까 말까 한 지경이니, 자기가 아니라 세상에 집중해야 한다. - 15쪽


세상과 화해해서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지금 공부란 생존의 도구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 - 16쪽


공부는 언제나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세상을 바꾸는 자유와 해방의 도구이자 과정이다. - 18쪽


철학자 존 듀이는 배움의 근본적인 특징이 '의존성'이라고 말하며 섣부른 '독립을 경계했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살아간다는 게 곧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은 이미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의탁하며 배우고 있다. 따라서 홀로 배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가 이미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의탁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했을 뿐이다. 이게 배움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교만이다. 공부는 '홀로'라는 교만에 저항한다. - 22쪽


01 공부할 이유가 사라지다


01_1 신분 상승과 반학교 문화


현재의 교육이 결정하는 것은 미래의 경제자본뿐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는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이 있었다. 사회자본이다. 사회자본이란 한마디로 말해 인맥, 즉 그 사람의 주변에 이떤 사람이 있는지를 의미한다. - 31쪽


근대적 계산이란 실은 부정성에 기초한 것이다. 즉, 덧셈을 통해 확실성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뺄셈을 통해 확실성에 다가가는 것이 근대적 합리성이다. - 35쪽


확신에 이를 만한 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고 싶은 것이 뭐냐"라는 긍정적인 질문은 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에 사람을 더 위축시킨다.

이 경에우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뭐냐?" "'어떻게'는 살기 싫은가"라는 질문이 좀 더 합리적이다.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나 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지난 경험 속에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는 것을 통해 자기에 관한 부정적 앎에는 도달할 수 있다. 적어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면 그것을 피해 다른 것을 시도할 수 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의 범위를 좁혀가다 보면 마침내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부정성에 기초한 합리적 사유의 방식이다. - 38쪽


예측 가능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계산을 하고 미래를 기획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예측 가능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과거를 보며 '성찰'하고 미래를 보며 '기획'한다. 성찰과 기획, 이것이 근대 사회에서 '사유'라고 불리는 것의 핵심을 차지한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성찰하여 그 과거로부터 나에게 주어진 것과 남은 것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돌아보고, 그것을 밑천 삼아 내 삶을 설계하는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유'다. - 40쪽


자기 미래를 근심하고 그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 자신의 모습을 파악하는 게 바로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적 삶에서 '사유'는 언제나 시간을 축으로 작동한다. 현재에 충실한 삶은, 적어도 근대적 관점에서는 '아무 생각 없는 삶'이다. - 41쪽


인간의 생각이란 능동적인 '함'이 아니라 수동적인 '겪음'에서 촉발되기 때문이다. 바지런히 무언가를 하는 동안에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대상에 힘을 가하는 게 아니라 대상이 나에게 힘을 돌려줄 때, 그 반발력을 느끼는 것이 바로 '겪음'이다. 무엇인가를 한 것이 튕겨 나올 때, 즉 '함'이 대상에 부딪쳐 반발되는 것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어. 이게 왜 이러지?'하며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다.

대상의 현존을 인식하며 그 대상의 힘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그 힘의 실체를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 정신을 팔지 않고 오롯이 나에게 벌어진 일에 집중한다. 이 집중이 다름 아닌 생각이다. - 43쪽


지금 아무리 참아도 미래에 돌아올 이익이 더 크지 않거나 매우 불확실하다면, 아무도 공부하기 위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지루함을 견디는 이 과정은 '고통'일 뿐이다. 아무 의미도 반전도 없는 고통을 감수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고 현재의 즐거움을 ㅟ하려 할 것이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기획하지 않으며 오로지 현재의 쾌락에 집중할 것이다. - 49쪽


01_2 자아실현과 탈학교 문화


신분 상승이 목적이던 시대에 욕망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었다. 개인의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윤리적/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동이었다. 신분 상승이라는 욕망은 있었지만 그 욕망의 주체는 '가족'이었으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욕망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 62쪽


어느 순간부터 학교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말이 '행복한 사람'이었다. 

이 '행복'의 핵심에 꿈, 즉 욕망이 았다. 나는 이때가 비로소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출현한 시기라고 본다. 개인이 더 이상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중심으로 자기를 바라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기 욕망을 중심으로 인생을 성찰하고 기획하는 존재, 그것이 개인이다. 따라서 '나는 ○○가 되고 싶은데'라는 말로 교육의 권위와 정당성에 도전한 것은 이런 욕망의 주체로서 개인이 탄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64쪽


꿈이 해방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억압의 언어가 된 이유는 꿈을 묻는 교육이 간과한 질문이 있기 때문이다. 꿈을 묻는 이들은, 이 꿈이라는 게 긴 인생 중 어느 시기에 묻고 찾고 발견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 질문하지 않았다. - 76쪽


탈학교 시대의 후반기로 갈수록 어린이/청소년을 해방하고자 한 언어인 '꿈'은 본의 아니게 억압의 언어가 되었다. 꿈을 가지지 못하면 '지질한' 사람이 되고, 꿈을 가지면 그 모든 준비를 열여덟 살 이전에 완수해야 하는 '강압의 언어'가 된 것이다. 오히려 입시에 의한 압박보다 꿈에 의한 압박이 사람을 더 궁지로 몰아넣고 비참하게 만든다. 부모와 교사가 자기 꿈을 위해 저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는데도 아직 꿈을 발견하지 못한 자신은 구제불능에 형편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꿈은 청소년을 해방하는 게 아니라 열패감, 즉 열등감과 패배감의 근거가 되어버렸다. - 79쪽


01_3 교육 불가능과 즐거운 학교


신분 상승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 생존과 계급 재생산이다. 자식이 부모보다 잘살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 … 중산층을 중심으로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지금처럼 사는 것'이 되었다. 현재의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게 최종적인 목표가 된 것이다. - 83쪽


사람의 성장이란 좌절을 경험하면서 좌절을 다루는 능력이 커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능감은 어렸을 때 안정감을 갖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지만 인간의 성장과 더불어 깨진다. 자신을 만능의 존재로 바라보다 좌절을 다룰 줄 아는 존재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좌절은 사람의 성장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공부 이외의 것을 부모가 다 알아서 해주고 자기는 온전히 공부에만 집중하며 늘 성과를 내다 보니, 만능감이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되면 좌절을 다루는 역량은 커지지 않는 불상사가 벌어진 것이다. - 93쪽


관리를 통해 자녀를 관리하는 부모의 등장이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심각하게 파괴한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자녀들의 또래집단이다. - 94쪽


형편과 가치관이 비슷한 같은 계급이 같은 동네에 산다. 이제 학교에서 학생들이 서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수준을 가로지르며 만나는 일이 없어졌다. 먼저, 학교 자체가 경제적 수준에 따라 '분리'되어 있다. 그 결과, 부모의 '친구 집단'이 곧 자녀의 '또래집단'이 되는 현상이 중산층을 중심으로 점점 일반화되고 있다. 엄마 친구의 자식이 곧 내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의 입김으로부터 독립된 그들만의 세계가 출현하기는 대단히 힘들다. 어린이/청소년 세계와 부모들 세계의 경계가 같고, 또한 부모들의 손바닥 위에 놓이게 되었다. - 97쪽


부모가 전문직 중산층에 개방적이지만, '불행히도' 자신은 공부에서 성과를 내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는 학생들은 삶에 대해 매우 불안해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가 부모 덕에 누리고 있는 삶의 수준에 만족한다. 그런데 이 정도 생활수준을 자기가 미래에도 누릴 수 있을지는 불안하다. 생존주의 시대에 '생존'의 의미는, 이들에게 부모 밑에서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생활수준을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누리는 것이다.

이들이 공부에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가 '독립'을 하고 나서도 지금 정도의 생활수준을 이어가려면 부모에 준하는 직업을 갖는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들도 알고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부모가 물려줄 자산을 독립을 위한 기반 정도일 뿐 그 이상은 직업을 통해서만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관심은 부모가 옵션으로 제시하는 '대안적 삶'이 아니라 '계급 재생산'이다. - 100쪽


이들을 가장 주눅 들게 하는 것은 부모의 합리성이다. 이런 부모의 특징이 말로 문제를 드러내고 해결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 문자 그대로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차분하고 끈질기게' 말로 묻고 말로 해결하려 한다. 그게 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세상을 만들어온 방식이다.

그래서 사달이 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이들은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 말로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을 경멸한다는 뜻이다. 천박하다고 생각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무시한다. 바로 이 점을 자녀들은 기가 막히게 알고 있다. 자기는 말로 부모를 상대하지 못하고 말로써 부모에게 다가설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는다. 소리를 지르거나 말문을 닫아버린다. 말을 잘못했다가 자기가 어떤 경멸과 모욕의 시선을 받을지 알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모의 말의 세계, 합리성의 세계에서 자기가 인정받을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 102쪽


억지로 공부를 시키려 하는 대신 모른 척하면서 내버려두다 보니 '딱 중간'에 속하는 학생들에게 학교가 '재미있는' 공간이 되었다. 먹고 자고 노는 총체적인 삶의 공간이 된 것이다. 자조적으로 말하면, 진보적인 교육계 일각에서 학교는 공부하는 곳을 넘어 삶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것이 전혀 의도하지 않게 뒤에서 만들어진 셈이다. 비공식적으로 만들어진 이 '삶의 공간'에서,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만 무기력할 뿐 자기들끼리는 활력 넘치게 살고 있다. - 107쪽


02 자기계발의 공부에서 자기 배려의 공부로 


02_4 폐기나 보완이 아니라 전환이 필요한 이유


우리는 삶에서 전면적인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더 이상 과거처럼 성장이 가능한 사회가 아니라면, 우리 삶이 전환되어야 한다. 공부가 그 전환을 슬기롭게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삶을 어떤 방향으로 전환해야 하며,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탐색하고 준비할 수 있는 공부로 전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내 강조하는 것이 바로 '삶의 전환을 위한 공부의 전환'이다. - 116쪽


실제적이라는 명목으로 공부의 목적을 이처럼 '단기화'하는 것이 당장은 학생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여 어느 정도 공부로 유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긴 호흡의 공부를 통해서만 만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만들지 못한다. 공부를 지속할 힘이 있는 몸 말이다. 공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견디고 즐기는 몸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습관과 몸을 가진 사람이 배움을 지속할 수 있다. - 118쪽


이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초조함'이다. 단기간에 실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으로 지금 배운 것이 시간낭비면 어쩌나 하는 초조함에 사로잡혀 있다. 좀처럼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이 초조함이야말로 지금 사람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초조해서 긴 호흡으로 자기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구조적인 문제에 관한 고민과 토론을 관념적인 탁상공론으로 여기게 한다. 여기서는 '해법'을 찾을 수가 없다. - 125쪽


이 시대의 자아실현은 곧 성공을 의미한다.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으로 누구나 해야 하는 것처럼 말해지지만, 그 실체는 '성공'이기에 실제로는 극소수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실체는 성공인 자아실현에서 절대다수는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고 패배자가 되리라는 공포에 일상적으로 시달리게 된다. 그 결과, 아예 아무것도 안 함으로써 성장 자체를 포기하는 파국적 양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 127쪽


자아실현을 강조하든 생존을 강조하든, 이렇게 성공한 삶을 살기 위해 이 시대의 사람들은 미친 듯이 '노오력'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평균적인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평균적인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평균 아닌 평균에 도달해야 한다는 압력이 팽배한 사회는 사실상 성공하지 못한 모든 사람을 실패한 자로 낙인찍는다. 다들 자기가 실패한 사람, 낙오자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자아실현이 탈락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되면서 공포의 원인이 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탈락을 정당화하고 사람을 패배감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는 점이다. - 130쪽


02_5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


'자기 배려'를 위한 공부의 두 측면 중 첫 번쨰는 자기의 한계를 아는 것, 두 번째로는 자기 한계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다. - 137쪽


한계를 아는 것이 자기를 보호하고 배려하는 길임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현대의 교육과정에서 전문가가 되는 과정이라 자기가 아는 것이 무엇이고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그 경계를 확실하게 알아가는 과정이다. 전문가는, '전문'이라는 말 그대로 자신이 한 분야의 전문가이지 모든 것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 143쪽


전문가는 분야의 한계와 조건, 기예 그리고 재능의 한계를 안다. 자기가 처한 한계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정확하게 판별하고 판단하는 게 전문가다. 이런 점에서 전문가란 그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자기 분야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 147쪽


자기를 보호하고 배려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것을 개인의 기예와 태도의 문제로 삼지 말고 사회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한계를 개인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아버지는 이 모든 게 '욕심'의 문제라고 말했지만, 돌아보면 그 '욕심'은 누가 만들고 누가 부추겼는가? 그 '욕심'으로 인해 빚어지는 사건 사고와 같은 결과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그저 '욕심'을 부추기기만 한 시스템과 책임 주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 배려는 아버지의 경우처럼 안전과 보호의 개인화를 의미할 뿐이다. 그래서 자기 배려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보호 장치, 즉 '사회'를 만드는 기예다. - 154쪽


자기가 '충분히' 해봤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인데, 자기기만에 의해 그것을 부정할 수도 있는 역설, 이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가 있다. 누군가가 '충분히' 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다른 한 사람, 바로 '스승'이다. 대부분의 스승은 자기 한계를 아는 자다. 그래서 한계가 무엇인지 안다. 또한 제자를 오랫동안 관찰해왔기 때문에 그가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시도했고 그 재능의 한계에 도달했는지 알 수 있다. 이게 스승의 '전문성'이기 때문이다. 제제가 자신이 도달한 한계를 넘어설 경우 스승이 하는 말은 동일하다. "더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 하산하여라." - 158쪽


자기 파괴를 막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환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욕망의 문제다. 자기를 배려하는 것은 욕망을 어떻게 다스리는가의 문제가 된다. 우리는 흔히 자기 자신과 자기 욕망을 동일시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말이 드러내는 바가 그렇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곧 나이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게 나를 배려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현명한 이들은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삶을 노예의 삶이라고 불렀다. '하고 싶은 것'에 끌려다니는 삶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대의 현자들은 욕망의 주인이 되라고 가르쳤다. 욕망의 주인이 되는 길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언제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언제든 그것을 그만둘 수 있는 것이다. 주인의 힘은 '이루게 하는 힘'이 아니라 '그만둘 수 있는 힘'이다.

두 번째는 탁월함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다. 탁월함을 '숨의 길이'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숨의 길이를 다루는 정도, 즉 다룸의 기예로 판단하는 것이다. 내 숨의 길이가 1분인지 5분인지를 가지고 탁월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내 숨의 길이가 1분이라면 5분이라는 숨의 길이는 애초에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기예와는 무관한 재능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숨의 길이가 탁월하게 긴 사람이 있다. 이런 재능은 자신의 노력과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다. 나와 함께 《공부 중독》을 쓴 하지현 선생은 재능이 영어로 gifted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늘로부터 선물로 주어진 것이 재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재능은 인간의 힘으로 계발하거나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또한 내 재능과 다른 사람의 재능을 비교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이런 재능은, 그것을 받은 사람이나 주변 사람 또는 인류 모두에게 주어진 선물로 감사하게 사용하며 그 열매를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최고가 아니라 해도 각자의 재능 역시 이런 '선물'처럼 주어진 측면이 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각자 하늘로부터 얼마나 '풍성한 선물'을 받았는지 비교하는 게 아니다. 관건은 그렇게 선물로 받은 재능을 각자 얼마나 잘 쓰고 있는가다. 이렇게 되면 주어진 것 자체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가, 그 선용의 정도가 탁월함을 기준이 된다. 이것이 인간이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하는 탁월함이다. - 161~162쪽


02_6 자기를 배려하는 법


자기를 배려하기 위해 우리는, 배려해야 할 '자기'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 164쪽


자기 배려를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나'와 '나에 속한 것'을 분멸하는 것이다. 나에게 속한 것은 첫째, 무엇보다 우선 재산, 즉 소유가 있다. 내가 나를 대하는 법은 '배려'다. 반면, 나에게 속한 것이나 내가 가진 것은 배려가 아니라 '활용'의 대상이다.

둘째, 육체가 있다. 육체를 잘 돌보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보다는 역시 육체로는 환원되지 않는 '나'를 위한 것이다.

셋째, 지위나 정체성 같은 것이 있다. 이 모든 것은 나를 설명하는 속성이지 나 자신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면 자신을 도구화하게 된다. - 165~167쪽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가장 '나'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나의 욕망'이다. 우리는 흔히 자기를 안다는 것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람이 이해하는 자기 자신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것'과 같다. 이렇게 될 때 우리가 돌보아야 하는 자기는 곧 자신의 '욕망'이다. 너 자신의 욕망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라. 이 시대는 이 명제 위에 서 있다. 그렇기에 욕망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를 곧 나의 욕망이라고 생각하면서 욕망을 실현하려는 삶은 욕망의 노예가 된 삶에 불과하다. 나의 욕망을 동일시하는 순간 욕망이 주인이 되고, 나는 그욕망에 끌려다니는 노예로 전락한다. 그래서 모두가 바라는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며 사는 삶'은 역설적으로 자기가 아니라 자기 욕망이 주체인 삶이다. 내가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욕망의 채무자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욕망은 배려가 아니라 '다스림'의 대상이다. …

영웅이 범인과 비교해 특별히 가지고 있는 힘은 '자기 규율 능력'이다. - 169쪽


이름은 활용이 아니라 돌보아야 할 대상이다. 사람은 자기 이름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떄로는 자신의 생물학적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기 이름이다. 무엇보다 자기 이름은 그 사람의 개체성과 그 개체성읜 존엄을 보증한다. 나아가 이름에는 자기 자신의 뿌리와 터전의 존엄과 명예가 걸려 있다. 이런 점에서 이름이야말로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람의 사회적 생명 전체라고 할 수 있다. - 171쪽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부터 그는 자기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법, 즉 자기부터 자기 자신을 존엄한 존재로 여기는 태도를 갖게 된다. 이름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 172쪽


'이름'이 곧 나 자신이거나 나의 전부는 아니다. 이름은 나라는 존재 이상일 수는 있지만 내가 집중해서 돌보고 배려해야 하는 '나 자신'이라고 볼 수는 없다. - 176쪽


우리는 나 자신에 관해 생각하면 할수록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 이는 자기에 관해 생각해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 혹인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게 무엇인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고 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숭산 큰스님은 "오직 모를 뿐"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자신에 관해 알아야 하는 것은 오직 모르고 있다는 사실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에 관해 안다는 착각이 자기를 망친다. 자기 아닌 것을 자기라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177쪽


자기 배려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존재로 대하는 것이다. 모르는 존재, 알 수 없는 존재, 즉 철학에서 말하는 타자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가장 큰 특징이 "도대체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타자는 내가 아닌 존재이기 때문에 나는 알 수 없는 존재다.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모르는 존재, 타자로 대해야 한다. 모를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 자기 말을 듣기, 이것이 자기 배려의 출발인 것이다. - 178쪽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아니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자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 그 중에서도 자기가 언제 세상을 배움의 자세로 대하는지에 관한 앎이다. …

한 사람이 배우는 방식은 다른 사람이 배우는 방식과 다르다. 각자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파악하고 그 원리를 이해한 후 그것에 맞추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배우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자기를 안다는 것은 자기가 배우는 방법이 무엇인지 안다는 뜻이다. 내가 어떻게 배우는지 모른다면 '모르는 것'을 중심에 놓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기가 어떻게 배우는지 아는 사람만이 배움을 중심에 놓는 삶으로 전환할 수 있다. - 183쪽


목적의식적인 배움의 과정에서는 자기가 어떻게 배우는지를 깨닫기가 좋다.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집중한다는 것은 내 배움의 기술을 관찰하고 파악한다는 뜻이다. 어떤 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지금 배우고 있는 그 지식과 기술의 기량만 느는 것이 아니다. 배움의 기술 자체를 동원하고 배우면서, 배움의 기량이 향상된다. 그렇기 때문에 배움의 과정에서는 내 배움의 기술을 관찰하고 파악하기가 좋다. 즉,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집중한다는 것은, 자신이 배움에서 어떤 기술과 방식을 사용하는지 관찰하고 파악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탁월한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사물과 사태를 관찰하는 힘을 키우는 게 매우 중요한 이유다. - 184쪽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의외로 내가 나를 잘 알기는 힘들다. 내 얼굴을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스승은 제자의 기량과 그 한계뿐만 아니라 제자가 배워나가는 태도를 관찰하고 파악하는 게 '전문'인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는 제자를 관찰하면서 그에게 잘 맞는 방법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화두를 제시한다. - 185쪽


주제이자 방법인 화두는 세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의미한다. 내가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하는 나 자신과 저 세상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가? 이 유일하고 결정적인 태도를 질문의 형태로 집약한 것이 화두가. 다른 말로 하면, '그' 질문일 때 알고 싶은 것에 관해 내가 가장 잘 집중하며, 답을 찾는 일을 가장 잘 지속할 수 있다. 제자의 배움의 태도를 지속시키는 데 최적화된 것이 바로 화두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부는 곧 태도다. 배움의 태도란 결국 자기 자신과 대상을 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세상을 대하고 집중하고 그 집중을 지속시키는 나의 태도를 알아가는 것이 바로 자신에 관한 앎이다.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곧 자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알아간다는 말이 된다. - 186쪽


가장 나쁜 배움의 태도가 자기 배움의 방식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배우는 것이며, 그런 태도를 강요하는 것이다. 반대로, 가장 좋은 태도는 자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잘 알고 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기를 아는 자만이 자기를 배려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자기 태도를 알아야 공연히 헛된 힘을 쓰며 무리하다 배움에 지치는 것을 막고 성장을 도모하며 배움의 기쁨을 향유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자기의 성장을 돌보고 지속적으로 도모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래야 나의 삶이 서사적인 것이 되고, 그런 서사성이 없다면 내 삶에 '자기'라고 부를 것이 없어진다. 삶에 이미 자기가 없는데 자기에 대한 배려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렇기에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자기의 성장을 도모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 189쪽


내가 나를 다스리는 기예의 한계에 부딪치고 나서야 내가 내 마음 다스리는 법을 모른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다. 나에게 집중할 때 이 문제를 다룸의 기예, 즉 내 배움의 문제로 전환할 수 있다.

이것이 관건이다. 우리는 문제를 나 자신의 문제로 전환할 수 있는가. 이렇게 전환해야만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재능의 문제를 기예의 문제로 전환하고, 다른 사람의 문제를 내 기예의 문제로 전환할 때,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문제를 배움의 문제로 전환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으며 해결할 수도 없다. 이것이 자기 배려의 초점이다. 전환의 배움은 문제를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 193쪽


03 공부, 재미에서 기쁨으로


03_7 공부, 성장의 기쁨


'해치우는 것'으로서의 공부에는 '해보는 것'만 넘쳐난다. 더구나 이 '해치우는 것'에는 해보고 난 뒤 결과가 돌아와 나에게 교훈을 주는, 그런 '겪음'이 없다. 그 공부를 하는 동안 내가 무엇을 '겪었고' 그 '격은 것'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이끌어내야 하는지 생각할 틈이 없다. 내가 공부한 것의 의미를 되새길 틈은 없고 다만 수량화된 성적만 돌아온다.

이런 공부에는 연속성이 없다. 앞에 한 공부와 뒤에 하는 공부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 197쪽


성장의 핵심은 연속성이다. 경험의 갱신을 통해 삶이 연속적으로 진행될 때, 우리는 그것을 성장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삶에서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연속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삶의 연속성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목적의식적인 과정이 바로 좁은 의미에서의 교육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교육이란 자기 경험을 연속적으로 바라볼 줄 알고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성장의 기쁨은 연속성에 있다. - 199쪽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것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 즉 연관성을 알게 될 때 무질서해 보이던 것의 질서가 보인다. 분별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질서가 보이면 내가 그 사이 어디에 개입해야 하는지 보여서 통제할 수 있다. 개입을 통해 바꿀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힘이 지적 쾌감을 준다. - 201쪽


지적 활동이란 원인과 결과, 자기 행동과 영향의 연속성을 가능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 202쪽


배움을 지속하려면 흥미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흥미는 듀이가 말한 것처럼 "끈질기게 일을 추구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다. 흥미는 시작과 목표에 관한 내적 연관, 자기의 삶과 결과에 관한 내적 연관, 공부를 통해 얻는 지식과 기량, 자신의 영향력에 관한 내적 연관, 공부를 통해 얻는 지식과 기량, 자신의 영향력에 관한 내적 연관이 있을 때 유지된다. 흥미가 이어질 때 사람은 견디는 힘, 즉 지구력을 키울 수 있다. 그리고 이 견디는 힘이 성장하는 것을 보며 그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듀이는 흥미란 "예상된 결과의 실현을 위해서 나아갈 때 그것이 얼마나 그 사람을 강하게 사로잡는가의 정도를 재는 기준"이라고 말한다. - 203쪽


배우는 이의 기량으로 시작과 결과를 파악할 수 있게 하려면, 현재 배우는 이의 삶/수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것을 시작점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중간 조건을 발견하는 것 또한 배우는 자의 기량에 맞춰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가르치기 위해서는 배우는 자의 한계와 기량을 파악하고 아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이 배움의 목적에서만이 아니라 과정에서도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205쪽


배우기 위해서는 자기 기량과 그 한계를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용기를 내야 한다. 내가 모르는 게 뭔지 알기 위해서는 시도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런 시도를 하기 위해서는 '아는지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존재'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교실에서 교사와 동료 학생들에게 자기를 완전히 무지한 자로서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이 부끄러움을 무릅쓰는 용기가 있어야 자기 기량의 한계를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좋은 배움의 공간이란 무지한 사람이 배움의 용기를 낼 수 있는 곳이다. - 207쪽


사람을 환대하는 것이 자리를 내어주는 행위라고 할 때, 우리가 내어줘야 하는 자리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람에게 역할을 주는 '일'자리이며, 두 번째는 그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뻗을' 자리이고,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누울' 자리다. - 208쪽


사람은 배움으로써 자유와 창조의 기쁨, 향유의 기쁨 이 두 가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세상의 법칙을 알고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는 선용을 넘어, 그것을 변용함으로써 사람은 자유로워지고 창조의 기쁨을 누린다. 창조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능수능란한 기예를 배우고 익히며 연마하는 과정이 바로 공부다. 한편, 인간의 창조하지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공부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누릴 수 있다. 창조하고 향유하는 삶, 이것이 멋진 삶이며, 멋지게 사는 것은 삶의 목표이자 공부의 쓸모다.

창조와 향유, 이 모두에서 인간이 누리는 기쁨이 바로 성장의 기쁨이다. 공부를 함으로써 창조와 향유의 기예가 조금씩 늘어간다. 그 기예가 늘어갈수록 내 자유의 폭이 넓어지고 싶어진다. 더 많은 것을 더 제대로 누릴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나의 기량이 조금씩 늘어가는 것이 성장이라면, 성장이 있는 삶은 기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공부는 이렇게, 성장을 통해 기쁘게 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공부의 목적은 재미가 아니라 기쁨이다. - 216~217쪽


03_8 공부, 자유와 창조의 기쁨


인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므로, 이미 있는 것, 주어진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주어지지 않은 것을 주어진 것으로 착각할 때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선용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앎은 활용의 전제다. - 221쪽


자연법칙은 주어진 것을 활용하기 위해 인간이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바로 '아는 것'이다. 자연법칙을 모르면서 그것을 활용할 수는 없다. 그게 왜 그런지, 어떻게 그런지는 아직 모른다 해도, 그것을 일관되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패턴이라도 알아야 한다. 그 이후에 그것이 왜 그런지, 즉 법칙을 알면 인간은 그것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앎은 활용의 절대적 전제조건이다 활용하기 위해서는 활용 이전에 알아야 한다. 지식 공부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 222쪽


앎은 활용의 출발점이다. 안다는 것과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주어지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출발점이 될 수 없다. 출발점이 될 수 없는 것에서 시작한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사상누각이 될 뿐이다.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의 경계를 아는 것, 그게 바로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이다. 한계를 아는 사람만이 무리수를 두지 않고 자기를 배려할 수 있다. - 223쪽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난 다음에 구분해야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주어질 수 있는 것과 주어질 수 없는 것의 구분이다. 만일 우리가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만을 구분한다면, 사람의 삶에 성장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것과 어떤 경우에는 주어질 수 있는 것으로 구분된다. 전자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만 후자를 포기하는 것 역시 어리석다. - 224쪽


주어진 것이 아니고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이때 중요한 것이 '전환의 역량'이다. - 226쪽


재능과 같이 개인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사회적 노력을 통해 주어질 수 있는 것으로 바뀐다. - 227쪽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에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바로 '활용의 불평등'이며 이 불평등을 시정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배려하기 위해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활용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주어진 것에 불평등이 심해 활용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첫째, 이들에게 활용할 것이 공평하게 분배되는 것, 둘째, 이들이 가진 것을 활용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 이 두 가지다.

따라서 좋은 사회란 주어질 수 있는데 주어지지 않은 것을 평등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보정하는 사회다. 좋은 사회란, 사회만 훌륭하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별 볼 일 없는 사회가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훌륭해지는 것을 공공선으로 삼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 228쪽


배움은 머리-앎을 넘어 손-다룸으로 옮겨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배움이 사변적인 것이라면 익힘은 그 배움을 육화, 즉 물질로 만드는 과정이다. 육화되지 않는 배움은 쓸 수 없는, 그렇기에 쓸모없는 배움이다. 그렇기에 배움은 앎의 문제에서 다룸의 문제로 전환된다. - 230쪽


다룰 줄 아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꿈꾸는 자유는 그저 '내 맘대로 하고 싶다.'라는 공허한 바람에 불과하다. 활용이 없는 자유, 다룸이 없는 자유를 꿈꾸지만, 이런 자유는 불가능하다. 이런 자유를 꿈꾸는 한 그는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고 그저 불만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 232쪽


능수능란함의 방법론을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손을 다루는 기본에 관해서 말할 수는 있지만 손의 힘을 조절하는 것은 자기가 해보면서 깨닫는 수밖에 없다. 다룸은 익힘의 문제다. 익힘을 통해 알아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익혀가는 경험 없이 다룰 줄 알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어떻게'라는 질문은 다룰 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다. 가장 구체적인 것을 묻는 듯하지만 사실은 가장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묻는 것에 불과하다. …

지금 당장 방법론을 묻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답은 단 하나다. 익힘의 과정을 함꼐 할 수 있는 스승 혹은 그 익힘의 과정을 함께하고 있는 동료를 만나라는 것이다. -233쪽


인간은 다른 자유를 꿈꿀 수 있다. 법칙에 종속된 존재라서 오로지 법칙에 따라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법칙은 지키되 그 법칙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내가 법칙을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가 자유의 척도가 된다. - 234쪽


'생각하는 손'이 매혹적이며 아름다운 이유는 이 자유가 새로운 양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자유란 법칙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여 새로운 양식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법칙이 '주어진 것'이라면, 자유는 주어진 것의 바깥으로 탈출하는 게 아니라 그 주어진 것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여 '걸림'과 '거침' 없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양식이 된다. 이런 활용을 변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어진 것을 활용하고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는 것을 넘어, 변화를 주어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 236쪽


매혹은 또한 자유로워지는 가정을 견디게 한다. 자유로워지려면 능수능란해져야 하고, 능수능란해지려면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익힘의 과정은 고단하고 지루하다.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고, 그 반복에서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기쁨을 누리기 힘들다. 창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변용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생각하는 손의 능수능란함에 대한 매혹 없이는 이런 익힘의 과정을 견딜 수 없다. 배움은 미적 매혹에서 시작하고, 이 매혹이 배움을 견디게 한다.

아는 것만으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아는 것을 다룰 수 있게 될 때 사람은 자유로워진다. - 238쪽


익힘의 시작 단계에서 이 지루함을 견디게 하는 것은 매혹이다. 그러나 매혹의 힘이 끝까지 가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익힘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익히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은 익힘의 결과에서 과정으로의 전환이다. 익힘의 과정에서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어떤 기량이 생기는지 알기 위해 다시 한 번 자기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 243쪽


익힘의 과정에 있는 이는 익힘의 결과에 넋을 놓지 말고 익힘의 과정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익히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때, 내 몸에 익혀지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익힘의 기예에서 가장 중요한 '견디는 힘'이 생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루함'을 견디는 힘이다. 배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지루함을 견디는 힘이 있어야, 우리는 익힘을 통해 능수능란함에 도달할 수 있다. - 244쪽


자기에게 집중할 때 사람은 익힘의 지루한 과정에서도 배움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역량이 증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배우고 익히는 법 자체의 특질을 발견하는 것을 비롯해 자기에 관한 앎에 도달하고, 그 앎으로부터 좀 더 수월한 것으로 만들거나 불가능한 것에서는 물러나는 등 배움과 익힘의 기예 자체를 키울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기술의 결과에만 집중하면 결코 보이지 않는 배움의 기술이다.

이 배움의 기술 역시 머리가 아니라 몸의 문제다. 듀이는 이것을 습관이라고 말했다. 배움을 통해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배우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다. 배우는 습관이 생긴 사람만이 계속 배움을 이어나갈 수 있다. - 245쪽


03_9 공부, 지적 쾌감과 향유의 기쁨


경탄은 기예에 호기심을 가지게 하는 출발점이다. 경탄할 만한 대상과의 만남이 선행하고서야 그 대상을 작품으로 만드는 기예에 관한 호기심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시작하게 하는 첫걸음은 바로 경탄이다. - 249쪽


나를 경악시킨 '무질서'의 뒷면에 이름이 있고 질서가 있다는 것, 이것이 미적인 매혹을 지적인 과정으로 이끈다. 공부를 통해 분별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분별의 결과다.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각각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 - 255쪽


공부는 분별의 힘을 키워가는 과정이다. 분별의 힘이 있을 때 비로소, 대상에 압도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불쾌에서 쾌로 나아갈 수 있다. 무질서에서 질서로, 경악에서 아름다움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분별의 힘이 향유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공부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될 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저 공부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공부의 쓸모와 목적을 명확히 해야 한다.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힘을 키우는 게 공부다. 공부는 향유의 기예를 익히는 것이다. - 256쪽


공부의 목적은 이 향유하는 힘을 키우는 데 있다. 사물과 우주, 세계와 삶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려면 반드시 배워야 한다. 배우지 않고 우주의 아름다움을, 삶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법은 없다. 아름다움이란 분별하는 힘을 통해 각각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고 그 이름들이 움직이는 질서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각이 만들어내는 움직임, 즉 운동의 무질서와 질서를 분별해내는 것, 그게 바로 향유다. - 258쪽



Posted by 앓음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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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서평 쓰는 법

2018. 6. 25. 18:56

서평 쓰는 법 : 독서의 완성 / 이원석 / 유유 / 2016.12.14


 책을 고르고 읽은 시간이 무색하게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책의 주제와 내용. 독서가라면 한 번 쯤 안타까워해봤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은 그 아쉬움이 오래도록 남아 기록이라도 남겨봐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마음에 서점이나 도서관의 서가를 두리번거리다 나처럼 『서평 쓰는 법』 같은 제목의 책을 들춰보지 않았을까.


 저자 스스로가 독서의 완성이자 글쓰기의 시작으로 서평을 선택했고, 서평으로 저자의 정체성을 빚어 현재는 자신을 서평가라고 칭할 수 있게 된 사람인지라, 서평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서평 쓰기를 전파하는 『서평 쓰는 법』은 181쪽의 재생종이로 인쇄한 작고 가벼운 책이지만 책의 구조와 내용을 살펴보면 개론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목차부터 체계적으로 정돈되어 있는데, 1부는 서평의 본질과 목적을 살피면서 서평을 정의하고 2부는 서평의 전제와 요소를 토대로 서평 쓰기의 방법을 일러주고 있다. 저자가 나눈 분류와 다르게 독자 입장에서는 총 8개의 중분류 중 (번호는 7까지 매겨져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서평의 방법을 모아담은 챕터가 8의 역할을 한다) 1~5는 서평 자체를 다루고 6~8이 서평쓰기를 다루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을 읽은 온라인 서점의 북 리뷰 중 상당수가 1의 서평과 독후감을 비교해 쓴 챕터를 주로 인용하는데, 서평과 독후감을 구분하지 않고 명명해온 이들이 많아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저자가 비교와 예시를 통한 비유를 선호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비교를 통한 맥락화」에서 고병권의 『화폐, 마법의 사중주』를 읽은 정정훈과 백승욱의 서평 비교가 대표적인 예다.


 이 책에서 돋보이는 지점은 서평의 요소 중 평가를 소개하는 7이다. 서평에서 평가의 의미와 요소를 분류하여 공들여 설명하고 있기도 하고, 독자가 추상적으로 서평을 떠올릴 때 평가는 쉽게 간과되는 지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독후감보다 심리적 진입장벽을 높이는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평가는 전문분야와 선이해를 바탕으로 하기에 저자든 독자든 부담감이 있을 수밖에 없는 동시에 서평 저자의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요소이다.


 7은 서평의 요소 중 하나인 평가를 안내하는 단락일 뿐임에도 서평에 대한 여러 관점을 공들여 선행해 쌓아온 이 책의 정점으로 읽힌다. 앞서 언급한 서평의 본질과 목적, 전제 등을 명증하게 드러내는 지점이 서평의 평가 기능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책 제목처럼 ‘서평 쓰는 법’을 알고 싶어 책을 고른 독자 입장에서 ‘서평’보다 ‘쓰는 법’에 방점을 두기 쉽고, 그러기에 ‘쓰는 법’은 서평쓰기 역시 통상적인 글쓰기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한 듯하다.


 『서평 쓰는 법』을 읽기 전후, 이 책의 여러 리뷰를 살펴보았다. 『서평 쓰는 법』을 읽은 독자라고하기엔 서평보다 책 소개나 독후감에 가까운 글들이 주를 이루었다. 여전히 서평 쓰기는 쉽지 않다. 이 책은 유려한 미문을 구사하지는 않는다. 성실하고 친절하게 정보를 전달하면서 강단 있게 의견을 개진하는 모범생 같은 책이다. 뛰어나거나 특색 있지 못해도 부지런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글을 읽어내면 너도 서평을 쓸 수 있다고, 책의 문체가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Posted by 앓음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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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의 정원 / 저자 : 토비 헤멘웨이, 출판 : 들녁


1부 1장. 생태정원이란?


[요약]


생태정원이란?


생태정원ecological garden은 

1) '퍼머컬처'와 '생태디자인'이라는 개념에 기초해 

2) 생태학적 원리인 자연이 일하는(한 식물이 다양한 기능을 하는) 방식으로 구성한

정원


퍼머컬처란 무엇인가?


permaculture = 영속적인 문화 permanent culture + 영속적인 농업 permanent agriculture

시초 : 호주의 빌 몰리슨이 제창하고 데이비드 홈그렌이 확장

목표 : 생태적으로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인간 공동체를 디자인

대상 자체보다는 관계를 디자인하여, 상호 연결 관계가 건강하고 지속가능하도록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일


▶ 퍼머컬처의 원칙


A. 생태디자인의 핵심 원칙

1. 관찰한다. 시간만 낭비하면서 사려 없이 행동하지 말고 장기적으로 세심하게 관찰한다. 사계절에 걸쳐 하나의 장소와 그 장소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관찰한다. 특정한 장소, 고객, 문화를 고려하여 디자인한다.

2. 연결한다. 요소들 간의 상대적인 위치를 이용한다. 즉, 모든 디자인 요소가 유용하고 시간이 절약되는 방식으로 연결되도록 배치한다. 요소가 몇 개 있느냐가 아니라, 요소들 간의 연결이 얼마나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이 건강하고 다양한 생태계를 만들어낸다.

3. 에너지와 물질을 붙잡아 저장한다. 유용한 흐름을 확인하고, 모으고, 유지한다. 모든 순환은 산출의 기회다. 경사, 하중, 온도 등의 변화는 모두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다. 자원을 재투자하면 더 많은 자원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4. 각각의 요소는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디자인의 요소를 선택하고 배치할 때, 각 요소가 가능한 한 많은 기능을 수행하게끔 신경을 쓴다. 다양한 구성 요소를 유익하게 연결하면 전체가 안정적으로 형성된다. 공간과 시간이라는 관점 둘 다에 유의하여 여러 요소를 적층한다.

5. 각각의 기능은 복수의 요소에 의해 유지된다. 중요한 기능은 다중적인 방법을 통해 수행하여 상승 효과가 일어나게 한다. 다중화는 몇 가지 요소가 실패하더라도 전체가 안전하게 유지되도록 한다.

6. 최소한의 변화로 최대한의 효과를 꾀한다. 작업하고 있는 시스템을 충분히 파악하여 그것의 '지렛점(leverage point)'을 찾은 다음, 바로 그 지점에 개입한다. 최소한의 작업으로 가장 큰 변화를 이룩할 수 있도록.

7. 소규모의 집약적인 시스템을 이용한다.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시스템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성공하면, 그 위에 또 쌓아나간다. '뭉텅이'로 넓혀나가는 것이다. 효과적인 작은 시스템이나 배치 방식을 발전시키고, 변화를 주면서 반복한다.

8. 가장자리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두 환경이 서로 만나는 부분인 가장자리는 시스템에서 가장 다채로운 장소다. 가장자리를 적절하게 증감시킨다.

9. 천이와 협력한다. 살아 있는 시스템은 대개 미성숙한 생태계에서 성숙한 상태로 진전한다. 이런 추세에 대적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여서 디자인을 거기에 맞추면, 일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 성숙한 생태계는 미숙한 상태보다 더 다양하고 생산적이다.

10. 재생 가능한 생물자원을 이용한다. 재생 가능한 자원은 대부분 생물이거나 그 생산물이다. 재생 가능한 자원은 번식을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크기가 늘어난다. 또 에너지를 저장하고, 수확량을 늘리고, 다른 요소들과 상호작용을 한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보다 이런 자원을 선택하도록 하자.


B. 행동양식의 원칙

11. 문제를 해결책으로 전환한다. 제약이 되는 요인이 오히려 창의적인 디자인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대부분의 문제는 자체적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영감을 주기도 한다. "우리는 주체 못할 정도로 많은 기회에 직면해 있다"는 말처럼.

12. 소득을 올린다. 투입한 노력에서 즉각적인 수익과 장기적인 보상을 모두 얻을 수 있도록 디자인한다. '배고프면 일할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긍정적인 피드백 고리를 만들어서 시스템을 구축하고 투자에 대한 보답을 받자.

13. 풍요로움에 있어서 가장 큰 제약은 창조력이다. 물리적 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디자이너의 상상력과 기술의 한계가 생산성과 다양성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14. 실수는 배울 수 있는 기회다. 당신이 겪은 시행착오를 검토하라. 실수는 일을 더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시행착오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면 실수로 인한 불이익은 사라진다.


자연과 '함께' 일하는 정원


생태정원은 사람이라는 생물을 환경과 연결시키고, 자체의 여러 부분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건강한 생태계를 보전하는 역할을 한다. 자연이 작동하는 방식처럼 서로 연결된 요소 하나하나는 각기 여러 가지 다른 역할을 수행하도록 디자인하면, 일을 자연에 맡길 수 있을 뿐 아니라 문제와 맞닥뜨리는 일도 줄어든다. 


정원을 가꾸려면 왜 그렇게 일을 많이 해야 할까?


생태정원은 관행적인 조경디자인과 농업이 파괴한 자연의 순환을 복원하는데 목표를 둔다. 관행 조경과 농업을 위한 기술은 큰 그림을 보지 못한 채 특정한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자연이 움직이는 방식을 이해하여 자연의 그물을 이루면 자연이 일하는 방식대로 균형 잡힌 경관의 정원을 만들 수 있다.


자연정원을 넘어서


사람의 거주를 목적으로 개발된 땅은 미국 기준 전 국토의 6%에 불과하고 40~70%는 도시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훼손되고 있다. 자연정원natural garden은 토착식물의 서식지를 만들고 보존하려는 데 의의를 두지만, 마당과 도시공원을 토착식물로 모두 채운다해도 토착종과 서식지가 사라져가는 형상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한데다 설령 그렇게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야생의 상태가 될 수는 없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마당의 생산물로 자급하는 생태정원을 디자인하여 단일 경작, 공장식 농장과 산업비림 등을 줄이는 편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토착종 대 외래종


개발로 파괴되고 척박해진 장소에는 교란된 장소를 갈망하고 가장자리를 좋아하는 기회주의적 식물이 들어온다. 외래종이 토종을 대체하는 칡 현상kudzu phenomenon이 발생하면 인간은 제초제를 뿌리는 등의 개입을 하지만, 토지를 이용하는 방법에 근본적인 변화 없이 외래종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는 일은 부질 없다. 개간해 빈 땅에는 햇볕을 좋아하고 빠르게 자라는 선구식물들이 자리잡기 마련이며, 이들을 뽑는 것보다 생태계를 성숙한 단계로 진척하는 용도로 활용하거나 그들이 자리잡기 전 그에 적합한 식물을 심는 편이 낫다.


종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기회주의적 식물을 일부러 도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나, 이들을 나쁜 것으로 낙인찍거나 퍼지게 조장하는 일은 자연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한 끼 식단을 자기 고장에서 나는 토착식물만으로 채울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나는 토착종과 외래종의 비율을 균형있게 심어야 하며, 생태정원에는 토착식물뿐만 아니라 식용작물, 약초, 곤충과 새를 유인하는 식물 등등을 심어 '합성' 식물군집plant community인 길드guild를 조성하는 방식을 추천한다.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사막이 꽃을 피우다


뉴멕시코 주 산타페 북부의 고지대 사막에, 조각가 록산 스웬첼은 꽃피는 나무 퍼머컬처 연구소Flowering Tree Permaculture Institute라고 부르는 오아시스를 만들었다. 1986년 헐벗고 흙먼지 가득한 고향 산타클라라에서 조엘 그랜즈버그의 도움을 받아 사막에 적합한 원예기술을 적용했다. 보통의 마당 역시 생태적으로나 농업에 있어서 사막이다. 생태정원은 우리의 마당이 자연과 깊이 연결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야기할거리]


이 책의 부제는 '텃밭에서 뒷산까지, 퍼머컬처 생태디자인'이다. 조금 더 읽어본다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1부 1장만으로는 '퍼머컬처'와 '생태디자인'이 이 두 단어가 어떻게 다른지 적확하게 구분하기가 어렵다. 굳이 두 단어를 생태정원을 소개하는데 전제로 하는 두 개념으로 분리해 사용했는지 여전히 헷갈린다.


자연의 한 요소인 사람을 위한 생태정원


퍼머컬처의 관점을 생각할 때 상반된 두 가지 입장이 있는 듯하다. 자연농에 가까운 위치에 서있는 이들에게는 퍼머컬처인의 태도가 인위적으로 자연을 계획하려 하고 효율을 중시하려는 측면이 있다는 불편함을 느낄 것이고, 관행농에 가까운 위치에 서있는 이들에게는 퍼머컬처가 과거회귀로의 태도나 전문화 또는 분업화되어 있는 현실에 역행하는 자연이라면 무엇이든 옳다는 무비판적인 찬양 조로 보일 수 있다. 저자가 생태정원에서 '사람'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이에 대한 답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자연스러운 경관 속에서 '사람'은 대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 24쪽

'야생동물정원'은 어수선해 보이기 일쑤며 야생동물에게 좋은 일을 한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면 모를까, 사람에게 주는 것은 거의 없다. - 25쪽

퍼머컬처는 자연을 모델로 삼으면서 인간 또한 포함된 경관을 디자인하려는 수단으로 시작했다. - 27쪽

퍼머컬처의 목표는 생태적으로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인간 공동체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 28쪽


퍼머컬처는 분명 사람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한편 사람이 자연 생태계의 일부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자연의 상호작용을 충분히 이해하라 조언하며, 그것이 사람의 일과 짐을 덜 수 있는 동시에 땅이 더 건강해지며 사람 외의 존재에게도 서식지를 제공한다고 말하고 있다. 지구 안 모든 생물들이 서로 상호협력하는 관계를 맺기 위해, 인간이 인간으로서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방법은 자연의 순리를 따를 수 있도록 사람이 도울 수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 퍼머컬처가 아닌가 싶다.


생태정원과 같은 사회를 꿈꾸며


"이곳에 있는 동안 깨닫게 된 사실이 있어. 네 종족을 분류하다가 영감을 얻었지. 너희는 포유류가 아니었어.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들은 본능적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데 인간들은 안 그래. 한 지역에서 번식을 하고 모든 자연 자원을 소모해버리지. 너희의 유일한 생존 방식은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거지. 이 지구에는 똑같은 방식을 따르는 유기체가 또 하나 있어. 그게 뭔지 아나? 바이러스야. 인간들이란 존재는 질병이야. 지구의 암이지."

 - 영화 매트릭스 스미스 요원의 대사 중


생태정원을 주장하며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는 실상 인간들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외래종을 이민자에 대입하면 이해하기 쉽다. 순혈주의를 강조하며 이주민을 적대시하기도 하고, 저출생과 인력 부족을 이유로 적극적으로 이주민을 유치하기도 한다.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정보의 흐름이 빨라진 현대사회에 더 많은 이주를 막을 방법은 없다. 정착민은 외부로 이주하는 이유도 이방인이 끊임없이 유입되는 까닭도 우리 사회의 현 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단순히 이주 현상과 문제점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표피적인 접근이다. 어쩌면 지금 여기서 생태정원을 말하는 「가이아의 정원」을 읽는 까닭은, 우리 사회가 생태정원과 같은 형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많은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Posted by 앓음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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